서문 – 이억배, 한국적 정서를 그리는 이야기꾼의 붓끝에서
이억배 작가는 한국 그림책계에서 가장 한국적인 시선을 가장 세심하게 구현해 내는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단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한국의 시골 풍경과 전통 민화의 화법, 그리고 어린이의 눈에 비친 세계의 색채를 한 화면 안에 겹쳐 표현하는 문화 해석자이자 감각적 철학자라 할 수 있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과장되면서도 생기 있고, 배경은 단순하면서도 구체적이다. 이억배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어린이는 단지 독자가 아니라, 이야기와 전통을 연결하는 감각의 주체로 재현된다.
대표작인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는 단순한 전래동화 재현을 넘어, 강하고 주체적인 여성상, 농촌 공동체의 따뜻한 연대, 상징으로 가득한 공간 구성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통합한다. 그는 단지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 공간과 인물의 감정에 한국인의 정서를 입히는 일을 해왔다. 실제로 그의 그림은 민화의 구성 원리와 미감을 빌리되, 아이의 눈높이로 재구성해내며, 정형화된 전통을 ‘살아있는 감각’으로 되살린다.
이억배 작가의 가장 큰 특징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리운 무언가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무의식에 저장된 문화적 기억을 불러내는 시각적 언어다. 따라서 이억배의 그림책은 아이들에게 단지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와 문화, 감정의 뿌리를 체험하게 하는 정체성 형성의 예술적 공간으로 기능한다.
민화의 시각 언어가 주는 심리적 안정감
민화는 원래 민중이 그린 그림이라는 뜻처럼, 정제되지 않은 자유로움과 일상에 스며든 상징성이 특징이다. 이억배 작가는 바로 그 민화의 시각 언어를 바탕으로 어린이 그림책 속 세계를 형성한다. 그의 작품에서 아이들은 종종 넓고 따뜻한 색감의 공간 안에서 살아가며, 세밀한 디테일보다 이야기 전체의 흐름을 부드럽게 따라갈 수 있는 구조 안에 위치한다. 이는 어린이 독자에게 시각적 과잉을 줄이면서, 정서적 안정과 몰입을 유도한다.
민화는 특히 여백의 미와 상징의 언어가 특징인데, 이억배는 이 점을 활용해 아이들이 상상력을 자유롭게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간’을 마련한다. 예컨대 《세상에서 가장 힘센 수탉》 같은 작품에서는 배경이 명확하지 않지만, 아이는 ‘수탉’이라는 상징을 통해 이야기의 힘과 구조를 자연스럽게 체득한다. 민화는 정형화된 원근법이나 사실성보다는 느낌과 의미 중심의 그림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 안에서 논리보다 감각으로 세계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인지적 이해에 앞서 정서적 수용과 문화적 감응을 우선하게 하여, 자기 정체성 형성 초기 단계에서 안정감 있는 내면 구조를 다지는 데 기여한다.
한국적 미감이 제공하는 문화 정체성의 뿌리
아이의 정체성은 단지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떤 문화 안에 속해 있는가’를 느끼는 과정이다. 이억배의 민화 스타일은 바로 이 ‘문화적 소속감’을 시각적으로 자극한다. 그의 그림책에는 기와지붕, 장독대, 한복을 입은 인물, 논과들이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며, 한국적 일상성과 미감을 시각적 환경으로 구성한다. 이러한 시각 요소는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아이의 눈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고, 무의식 속에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각인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문화 정체성은 비교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습득과 반복 노출을 통해 형성된다. 이억배의 그림책은 바로 그 지점을 정서적, 시각적 언어로 설계해 준다. 어린이는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의 부엌이나, 《수탉》의 마당을 통해 ‘우리 집 같은 느낌’을 경험하고, 이는 문화적 소속감의 씨앗이 된다. 이는 단지 한국 전통을 알게 되는 교육적 정보가 아니라, 그림책을 읽는 순간 느끼는 감정과 시각적 익숙함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소속의 정체성이다.
또한 이억배의 작품은 도식적이고 교훈적인 방식 대신, 아이 스스로가 감정을 따라가며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이는 권위적 교육이 아닌, 경험 기반의 정체성 내면화를 가능하게 하며, 자기 정체성의 핵심이 되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심리적 근거를 제공한다.
이야기 속 공동체 감각이 자아의 구조에 미치는 영향
이억배 작가의 그림책에서는 언제나 개인과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연결된 장면이 등장한다. 팥죽을 함께 나눠먹거나, 마을 사람들이 협력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가족이 조용히 식사를 하는 장면 등은 아이에게 자아는 혼자 존재하지 않고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이는 서구적 개인주의가 강조하는 ‘개인의 독립’보다 동아시아적 관계 중심 정체성 형성에 더 가까운 구조다.
그림책은 단지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관계의 패턴’을 통해 아이의 감정 패턴과 자아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이억배는 따뜻하고 정감 있는 장면 안에서 아이가 스스로 공동체의 일원임을 체감하게 하며, 이는 자존감과 안정된 정체성 형성의 기반이 된다.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에서 호랑이에게 당할 위기를 극복하는 데 주변 인물들의 연대가 중요한 역할을 하듯, 그의 그림책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강조하며, 공동체적 자아 모델을 제공한다.
이러한 구성은 현대 아이들이 겪고 있는 고립감, 정체성 혼란, 관계 불안을 일정 부분 해소해준다. 즉, 이억배의 그림책은 이야기 이상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아이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며, 네 자리는 이 공동체 안에 있다’는 존재의 근거를 감각적으로 제시하는 매개체가 된다. 이런 방식은 유아기 정체성 발달 이론에서도 매우 중요한 기반으로 여겨지며, 그림책이 심리적 교육 도구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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