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다 먼저 감정을 만드는 사람, 백희나
백희나 작가는이야기를 들려주기 전에 감정의 공간을 먼저 짓는 사람이다. 어린이가 책장을 넘기기 전부터 느끼는 감정, 장면과 장면 사이의 고요한 흐름, 그리고 침묵 속에서 은근히 번져 나오는 서정성. 이 모든 것이 백희나의 그림책에는 존재한다. 우리는 종종 이야기의 주인공만을 보지만, 백희나의 세계에서는 공기와 빛, 구석의 그림자까지도 이야기의 일원이 된다. 그녀의 그림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어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걷는 일에 가깝다.
그녀는 2010년 《구름빵》으로 시작해, 《장수탕 선녀님》, 《이상한 엄마》, 《알사탕》, 《달 샤베트》 등의 작품을 통해 아이의 마음속 그늘과 반짝임을 동시에 포착해낸 작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특히 캐릭터의 눈빛이나 주변 조명의 명암, 배경의 차분한 톤까지 감정 전달 수단으로 사용하며, 시각적 연출의 경계를 확장시켰다. 그녀의 그림책은 단순히 내용이 따뜻한 것이 아니라, 빛과 공간이 따뜻한 책이다. 바로 그 점에서, 백희나의 그림책은 어린이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전달하는 고유의 방식으로 기능한다.
빛과 그림자, 그 조용한 이야기꾼
백희나 작가의 가장 뚜렷한 시각적 언어는 빛과 그림자다. 그녀는 단순히 인형과 배경을 배치한 후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조명 연출을 통해 장면의 감정을 설계한다. 《이상한 엄마》에서 엄마가 사라지고 비 오는 날 외로이 창밖을 보는 아이의 얼굴에는 은은한 실내등이 감도는데, 그 조명은 두려움보다 기다림과 희망에 가까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아이들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겁을 먹기보다 감정을 따라 숨 쉬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림자 또한 그녀의 작품에서 단순한 ‘어둠’의 표현이 아니다. 《알사탕》에서 아이가 상상 속에서 돌아가신 할머니를 만나는 장면은 반투명한 빛 속에서 마치 현실과 꿈의 경계를 허무는 듯 연출된다. 이때 그림자는 현실의 무게이자, 감정의 여운으로 기능한다. 그녀의 연출은 고전 회화의 명암법처럼 극적이지 않지만, 아이들이 불안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감정의 이면을 느낄 수 있는 연출로 작동한다. 이는 시각적인 정보가 많을수록 혼란을 겪는 유아기에, 조명과 그림자의 리듬을 통해 심리적 안정과 감각의 일관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다.
조명 연출이 아이에게 전하는 정서적 ‘온기’
아이들에게 ‘조명’은 단지 밝기나 어둠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간의 감정,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안전한가?’라는 무의식적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에서는 조명이 결코 전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늘 이야기의 기저를 감싸고 있다. 황혼의 따뜻한 빛, 창가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 조용한 밤의 부엌을 밝히는 희미한 등불 등은 모두 아이의 감정 상태에 맞춰 세심하게 조율된 조명들이다.
이러한 빛의 연출은 특히 불안을 느끼기 쉬운 저연령대 어린이 독자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제공한다. 《장수탕 선녀님》에서 어두운 목욕탕 안, 아이는 선녀를 만나면서도 무서움보다는 이야기적 환상과 따뜻함을 먼저 느낀다. 그 이유는 공간 전체를 덮고 있는 부드러운 빛의 기운 때문이다. 백희나는 이런 빛의 언어를 통해, 아이가 이야기 속에서 두려움을 마주하되 그것에 삼켜지지 않고 감정의 여백을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 점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어떻게 경험하게 하느냐’**를 보여주는 섬세한 연출이다.
손으로 만드는 세상 – 수작업 작업 방식의 마법
백희나 작가의 작업은 디지털보다 느리지만 더 깊다. 그녀는 스토리보드를 짜고, 종이로 배경을 만들고, 인형을 하나하나 손으로 제작하며, 무대 세트를 설치한 후 조명까지 세심하게 조절해 사진 촬영을 한다. 이러한 작업은 한 장면을 구현하는 데에도 수일이 걸리는 매우 집요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결과적으로 질감과 온기를 담은 장면을 구현해 낸다. 특히 손으로 만든 인형의 표정은 디지털 그래픽이 줄 수 없는 작은 떨림과 인간적인 불완전성을 통해 아이들에게 감정적 유연함을 전달한다.
손으로 만든 세계는 아이에게 있어 더욱 현실감 있으면서도 판타지적인 이중적 경험을 선사한다. 너무 매끈하고 정확한 이미지보다는, 약간 울퉁불퉁하고 어딘가 아날로그적인 장면들이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감정 몰입을 돕는다. 또한 이러한 수작업은 ‘완벽한 것만이 좋은 것’이라는 무의식적 기준에서 벗어나, 불완전한 것에서 오는 따뜻함과 개성을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백희나의 세계는 그래서 완벽하지 않지만, 그 누구보다 감정적으로 충실한 세계다.
캐릭터의 눈빛과 표정이 품은 감정의 온도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에서 캐릭터는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눈빛, 손동작, 입꼬리의 미세한 변화가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녀의 캐릭터들은 단순히 귀엽거나 웃기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각각의 인형 캐릭터는 섬세하게 조형된 내면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유아 독자가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고 동일시할 수 있는 정서적 거울이 된다. 예를 들어 《알사탕》 속 주인공 동동이는 말이 적고 감정 표현이 서툴지만, 눈의 초점과 자세만으로도 외로움과 호기심, 기대감과 슬픔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런 감정 표현은 말보다 먼저 아이에게 도달하며,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감정적 소통 능력을 확장시킨다. 백희나의 인형 캐릭터들은 과장되거나 일차원적이지 않기에, 아이는 더욱 자유롭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다. 캐릭터들이 과묵하지만 따뜻한 존재들로 구성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이에게 그림책 속 친구는 말 대신 눈으로 대화하는 대상이 되며, 그 과정을 통해 아이는 자기감정을 더 정확하게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된다.
아이의 감정과 상상을 잇는 조용한 심리적 통로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은 종종 '이야기’보다 ‘공간’이 먼저 독자를 맞이한다. 그 공간은 이야기의 배경이자,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안전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심리적 방이다. 《달 샤베트》의 골목길, 《이상한 엄마》의 빗속, 《장수탕 선녀님》의 타일 벽처럼, 백희나의 공간들은 작고 사적인 영역 속에서 현실과 환상이 부드럽게 겹쳐지는 구조를 가진다. 아이는 그 공간 속에서 상상력을 안전하게 펼치며, 현실의 불안도 함께 녹여낸다.
이러한 공간적 구조는 아이의 감정 탐색과 상상 확장에 안정적 기반을 제공한다. 현실에서는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감정—그리움, 두려움, 분노 같은—이 이야기 속 공간에서는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림책은 그래서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감정이 ‘움직이는’ 공간이 된다. 백희나의 빛과 그림자 연출은 이 감정의 움직임을 조용히 안내하는 감정의 조율자 역할을 하며, 독자가 몰입할 수 있는 내면적 리듬을 형성해 준다.
결론 – 감정을 감싸는 빛, 백희나 그림책의 정서적 품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은 이야기보다 먼저 감정이 도착하는 공간이다. 그녀가 연출하는 빛과 그림자는 단지 시각적인 미장이 아니라, 정서를 조형하는 조용한 언어다. 어둡고 환한 빛의 대조가 아니라, 감정을 감싸는 부드러운 빛, 기억을 자극하는 흐릿한 명암, 그리고 침묵이 흐르는 장면. 모든 것이 한 장면 속에 동시에 존재하면서 아이의 마음을 조용히 다독인다.
그림책은 아이들에게 세상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문이기도 하다. 백희나 작가의 작품은 그 문을 열기 전,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잡아주는 어른의 손길 같은 존재다. 그녀의 빛과 그림자는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공감하고,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는 단순한 미적 성취를 넘어서, 유아기 정서 발달과 자아 형성에 실질적 기여를 하는 시각 예술의 사례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녀의 책을 읽고 나면 아이는 조금 더 조용히 울 수 있고, 조금 더 편하게 웃을 수 있다. 백희나의 세계는 그런 따뜻하고 조용한 안정감으로 연결된 미로다. 우리는 그 미로 안에서, 아직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만나고, 이해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빛으로 아이의 마음을 안아주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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